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쟈니스 사무소 (문단 편집) === 1980년대 === 오늘날 쟈니스하면 떠오르는 요소들은 1980년대부터 많이 부각되기 시작한다. 쟈니스가 일본에서 독보적인 남성 아이돌 기획사로 올라선 것도 이시기부터였다. 이전까진 소수의 여성 연예인도 키우고 있었으나[* 쟈니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후지시마 쥬리 케이코도 연습생 출신이다.], '''1980년대 이후에는 남성 연예인만 키운다'''. 그 외 백 텀블링 같은 [[아크로바틱]] 스타일의 안무를 내세우며 후대 쟈니스 그룹에도 상당기간 영향을 준 [[소년대]],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춤을 추는 특이한 컨셉의 [[히카루GENJI]] 등 기발한 아이돌 그룹을 계속해서 데뷔시킨다. 댄스 가수적 측면에서 보자면 이때가 쟈니스의 전성기였다고 볼 수 있다.[* 인기 자체는 이후 [[SMAP]]이나 [[아라시]] 등이 더 뛰어난 감도 있으나, 실력보단 그룹의 이미지나 캐릭터에 어울리는 멤버들을 주로 뽑아 데뷔시킨다는 느낌이 강해졌다.] 1980년대 초반 쟈니스는 [[타하라 토시히코]], [[콘도 마사히코]], [[노무라 요시오]] 등 이른바 타노킨 트리오를 차례로 데뷔시키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. 특히 콘도 마사히코는 데뷔 싱글이 '''창립 이래 최초의 밀리언'''에 연간 3위라는 대기록을 세우는 등 쟈니스의 암흑기를 끝낸 일등공신으로 쟈니스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. 이 때문에 메리 부사장이 매우 아끼는 연예인이었다고 한다. 뒤이어 1985년에 [[소년대]]가 데뷔해서 히트하고, 1987년에 데뷔한 [[히카루GENJI]]는 사회현상까지 언급될 정도로 큰 인기를 자랑하였다. 쟈니스를 지금과 같은 제국의 위치로까지 끌어 올려 준 것이 바로 1980년대 말의 히카루GENJI였다. 이후부터 쟈니스의 위상은 최소한 '''일본 남성 아이돌 업계에선 누구도 넘볼 수 없게 되었다'''. 하지만 1980년대 후반에 실력파를 자처하며 데뷔한 [[오토코구미]], 닌자 등이 실패하고[* 오토코구미는 아주 실패한 건 아니었다. 데뷔 초기 때는 [[오리콘 차트]] 1위도 여러 번 차지한 데다 [[도쿄 돔]] 공연까지 했을 정도로 나름 인기가 좋았던 아이돌 그룹이었다.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[[히카루GENJI]]가 압도적인 인기를 얻는 바람에 전성기가 짧았을 뿐. 해체 이후에는 각자 뮤지션, 배우의 길을 택했고 멤버 중 한 명이었던 나리타 쇼지는 2009년에 [[대마초]] 소지 혐의로 체포된 사례가 있었다.] 설상가상으로 생방송 음악 프로그램인 [[TBS 테레비|TBS]]의 [[더 베스트 텐]], [[닛폰 테레비|NTV]]의 노래의 톱텐, [[후지 테레비]]의 [[밤의 히트 스튜디오]]가 1990년까지 모두 종영된다.[* 지금에야 일본에서 음악방송이라고 하면 [[뮤직 스테이션]]부터 떠올리겠지만, 1980년대 음악방송이라고 하면 위의 세 방송을 가리켰다. [[히카루GENJI]] 등을 비롯한 아이돌의 주된 활동 무대도 이쪽이었다. [[뮤직 스테이션]]은 1986년에 시작된 '''후발주자'''로, 시청률 확보에 크게 고전하다가 1988년부터 히카루GENJI가 매주 출연하면서 가족 대상에서 청년 대상으로 노선을 바꾸고 지금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.] 이시기는 '아이돌의 빙하기'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아이돌 자체의 설 자리가 크게 좁아졌고 쟈니스 사무소 역시 위기를 맞게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